제목[2011.12.11] "WCC란 무엇인가?"-제5장…①2011-12-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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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란 무엇인가?' - 제5장 용공주의…①
 
WCC는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해방신학과 '하나님의 선교'라는 선교신학 패러다임을 따라 선교를 인간화와 해방투쟁과 동일시하고, 인종차별주의 철폐에 많은 인력과 재원을 투자했다.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철폐운동과 인민해방운동을 하는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에 여러 차례 거액을 지원했다. WCC 한국지부 격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는 이러한 움직임에 걸맞게 산업선교,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앞장섰고, 한국교회의 반공태도를 비판했다. 공산주의 위협에 대응하여 자유를 지키는데 이바지한 한국기독교의 반공 노력을 냉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고, 반공의 '죄'를 회개한다고 고백했다. 한국기독교인들은 북한의 남침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반공을 회개한다."는 KNCC의 발상과 그런 말을 하는 진보주의 신학 계열 교회들의 급진주의 성향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월남한 반공주의자 한경직 목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단체를 태동시켰다. 현재 66개 개신교단과 단체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WCC의 한국지부 격 단체인 KNCC는 8개의 회원교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이하게도 장로교 통합교단과 하나님의 성회(여의도측, 서대문측)는 두 단체에 모두 가입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WCC 가입 찬반 문제와 더불어 발생한 1959년의 한국 장로교회 분열이 있기 이전에도 용공논란은 한국교회의 화두였다. 저명한 한국교회사가들과 KNCC 관계자들은 WCC의 용공 활동을 지적하는 일부 보수계 기독교인들의 비판에 경악된 유감을 표하며 혹독하게 질타했다. WCC가 용공 활동과 무관한 것처럼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 호도한 것이었다.
1. 마르크스주의와 해방신학
구티에레츠의 해방신학은 WCC와 마르크스주의의 교량 역할을 했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 용어로 설명한다.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으로 간주한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며,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와 싸워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고, 그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 선교와 전도의 주된 목적이며 과업으로 여겼다. 교회의 최대의 과제는 사회구원을 위한 혁명대열에 앞장서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장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점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에 직접 참여하여 인간화와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투신해야 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WCC 제1차 총회(1948)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분쟁 요점을 살피고 모두를 경계하면서 양편 모두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WCC는 사회복음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패러다임을 따랐다. 인간화, 해방투쟁, 구조악 철폐를 '구원'이라고 보는 해방신학을 수용했다. WCC는 점차 그 활동의 폭을 넓히고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워졌다. 가난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을 '하나님의 선교'의 핵심과제로 여겼다. 해방투쟁과 그러한 운동과 연대하는 것을 기독교 구원과 동일시했다. WCC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하나님, 우주의 하나님과 언약의 하나님, 세계와 교회, 구원의 보통은총과 특별은총, 정의와 칭의, 사회개혁과 인간의 중생, 해방과 구원을 뒤섞어 놓는다. 하나님의 성육(成肉)과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며 이루신 구속사역은 정치적, 경제적 압제에서 해방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와 죄의 멍에에서 구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방콕에서 열린 WCC 세계선교대회는 모택동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할 정도였다. 구원을 사회주의적으로, 세속주의적으로, 인본주의적으로 이해했다.
2. WCC의 용공활동
미국 에반스톤에서 모인 WCC 제2차 총회(1954)는 괄목할 정도로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을 정죄하고 '인종차별투쟁사업(PCR)'을 선교의 주 과제로 삼았다. 인종, 피부색, 종족 기원 등에 기초한 어떤 형태의 분리도 복음에 위배된다는 확신을 표했다. 스웨덴 웁살라에서 모인 WCC 제4차 총회(1968)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해방신학의 논리를 공식화했다. "새로운 인간성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과 "인간의 필요가 있는 곳, 인구팽창, 긴장관계, 움직이고 있는 힘들, 제도적 경직성, 권력의 우선순위와 사용에 대한 의사결정, 공공연한 인간 갈등이 있는 곳"을 선교지로 규정했다. WCC는 '하나님의 선교' 원리에 따라 세계의 수많은 혁명운동과 해방투쟁 사업을 지원했다. 1970년에서 1978년까지 산하의 '인종차별투쟁사업(PCR)'에 미화 3백 6만여 불을 제공했다. 외세의 간섭을 거부하면서 "자기 나라의 일에 대하여 발언권을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인종적 피압박 단체들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원조"했다. WCC는 1978년 가을에 인종차별투쟁사업의 일환으로 로디지아 애국전선 게릴라들에게 8만 5천 불을 원조한다고 발표했다. WCC가 인종차별주의에 저항하는 민족단체들에게 지급한 돈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는 게릴라들의 식량, 보건, 농업, 난민구호, 그 밖의 인도주의 목적에 사용하라고 준 것이다. 그러나 WCC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감독할 기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쿠바에서 훈련을 받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게릴라 군대에 재정을 지원하고 정치적 지지를 보낸 것은 용공주의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모잠비크와 잠비아를 거점으로 삼은 테러전술주의자들은 그 돈을 납치, 살인, 정부 전복, 선교사들과 그 자녀들을 살해하고 민간비행기를 격추시키는 활동 등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WCC는 나미비아 게릴라 부대인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SWAPO)에 미화 12만 5천 불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인종차별투쟁사업은 1970년 이후에도 약 12개국 1백여 기구에 '인도주의' 명목으로 거액을 원조했다. 그 가운데 상당액은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 전복과 로디지아와 남서아프리카의 두 흑백혼합 과도정부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게릴라 단체와 기타 기구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정치혁명 단체들에게 들어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