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018.12.02] 제 마음의 고향, 제 영혼의 안식처 ... 공석화2018-12-0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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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의 고향, 제 영혼의 안식처 우리

은혜와진리교회에 다시 와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섭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공 석 화



 



▶ 저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헌신하여 하나님께 봉헌한 시골의 한 작은 교회를 다니다가, 청년기에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가 되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의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다시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신앙생활을 위해 분가를 바라며 기도한지 5년 만에 소원을 이루고 과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은혜와진리교회 과천성전에 가서 주중예배에 처음 참석하였습니다. 예배하는데 감동과 감격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지난날 하나님의 품을 떠나 교회를 멀리하고 살았던 날들을 후회하며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부모님과 남편 몰래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주일에도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남편을 간신히 설득하여 주일1부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오후에는 시어머님 댁에 가서 어머님을 정성껏 돌봐드렸습니다. 아이들이 교회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아동구역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성경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아동구역장 직분을 받고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5살과 3살 된 아들과 딸이 어느 날 할머니댁에 가서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말을 하여 어머님이 알게 되셨으나 다행히도 심하게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때 당시 어머님은 열심히 절에 다니고 계셨는데, 집안이 전부터 워낙 유교 사상에 젖어 있어서 무조건 기독교 신앙을 배척하고 가족 중에 누구라도 교회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손주들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셔서 저와 아이들이 교회에 가는 것에 대해 크게 싫은 내색을 안 하셨습니다.


 



그렇게 5년을 분가하여 살던 중에 남편이 IMF 때 명예퇴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기 위해 분당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의 어머님 집은 세를 놓고 어머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결혼 10년 만에 어머님과 다시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겼습니다. 더욱이 제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어머님이 탐탁해하지 않으셔서 더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어머님은 자주 외로워하시며 서울 집을 그리워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73세 된 여름에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어머님은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서울 집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에 거처를 다시 서울로 옮기셨습니다. 휠체어에 의지하는 불편한 몸으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휠체어에 어머님을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다가 한 작은 교회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어머님께 함께 교회에 다니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어머님을 돌보는 서울 집에서 판교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 우리 교회를 다니는 것에 불만이 많으셨던 어머님이 제 예상과 다르게 “그래, 그러자꾸나” 하셨습니다. 뜸들이지 않고 흔쾌하게 대답하시는 어머님의 말에 얼마나 제 가슴이 떨리고 감동스럽던지, 지금도 그 때가 생생히 기억됩니다. 10년 넘게 어머님을 전도하면서 기도해 온 저였기에 그날의 기쁨과 감사함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15년을 섬겨온 정든 우리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옮길 생각을 하니 너무나 슬프고 속상했습니다. 판교성전에서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여러 번 심방을 오셨는데, 그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그 때 꼭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드렸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님과 가족과 함께 동네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 남편은 제가 기도한지 10년 만에 우리 교회 수요 저녁예배에 참석하여 주님을 영접하였고, 어머님은 15년 만에 주님을 영접하셨습니다. 그 후 어머님은 3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에 가셨습니다. 돌아가실 때의 모습은 마치 천사의 얼굴 같이 빛이 났으며 제가 20년을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아름답고 환한 얼굴 모습이셨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저는 중직자가 되어있었습니다. 열심히 선교와 봉사의 여러 부서에서 헌신하고 있던 2013년 5월, 제가 전도하여 수원성전과 대전성전에서 우리 교회를 섬기는 두 동생이 매일 같이 WCC 관련 책자와 조용목 목사님의 설교말씀 테이프를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WCC가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혼합주의의 온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정체를 알고는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태까지 섬기던 교회가 WCC 부산총회를 유치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교단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다시 교회를 옮기기로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딸과 함께 작정기도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교회에서 권사님 한 분과 작은 다툼이 일고, 그 다툼이 불씨가 되어 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제가 했던 다짐과 기도를 기억하시고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시고 결단하게 도와주셨습니다. 6월 첫째 주에 저는 담임 목사님을 찾아가 전후 사정 이야기를 다 말씀 드리고 우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사건은 그 교회에 충격이 되었고 특히 WCC에 관련하여 성도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판교성전의 장로님과 수구역장님과 구역장님들 그리고 많은 성도님들이 저를 기억하시고 환영하면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의 은혜롭고 영력 넘치는 설교말씀, 성령충만한 주님의 일꾼들…. 10년 만에 돌아온 우리 교회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교회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처음으로 만난 분 또한 저를 그토록 기다려주신 수구역장님이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제 교적과 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실로 감동이었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친정집을 찾은 것처럼 하루하루가 감격스러웠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꿀송이 같이 달고, 저를 사랑해 주시는 교역자님들로 인해서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후 5년을 전도사님을 모델로 삼아 전도하고 심방하면서 수구역장이 되었습니다. 성남에서 분당으로, 그리고 판교로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따라다니기만 했더니 하나님께서 제 가정에 풍성한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들의 전세금을 다 날릴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문제가 잘 해결되게 도와주시므로 단돈 천원도 손해를 보지 않게 된 것을 시작으로, 아들과 딸의 혼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뒤 돌아보면 자상하신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지난 봄에 딸이 우리 교회에서 대교구장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을 상기하고 기도한 다음, “저는 주님의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그러니 저희 가정의 일, 남편과 자녀에 관한 것들은 주님께서 책임져주세요!” 하며 집을 나서면 하루 종일 마음이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날마다 이곳 저곳에서 주의 일을 하며 열심히 봉사하시는 성도님들과, 은혜와 축복의 자리로 저를 이끌어 주시는 당회장 목사님과 사랑 충만하신 교역자님들로 인해서 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저의 모든 것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도와주셨기에 지금의 여기까지 제가 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부족한 저를 주께서 사용해 주시는 그 마지막 날까지 변함없이 주님의 일에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참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