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018.07.22] 중첩된 고난을 겪던 저에게 ... 박미정2018-07-22 11:25
작성자

“중첩된 고난을 겪던 저에게 이길 힘을 주시고,

가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박 미 정



 



▶저는 전남 해남 시골마을의 열심히 우상을 섬기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불교 신자인 할머니는 아버지와 장남인 큰오빠 생일만 되면 집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을 따랐습니다. 워낙 깊은 산골이어서 동네에 교회가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 집의 한 작은 방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에 있는 교회의 집사님들이 매주 십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 그 집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고 몇 안 되는 신자들에게 찬송가와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저희 어린 아이들에게 찬송과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습니다. 찬송하고 성경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너무 좋아서 할머니와 엄마 몰래 밭둑으로 기어가 친구 집에 다녀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들키면 혼쭐이 날 정도로 크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할머니는 어린 저한테 한 집안에서 두 신을 모시면 집안이 망하게 된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고 멀리서 그것도 서울에서 생활하려니 무척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길모퉁이에 난 풀만 봐도 고향 생각이 나고 반갑고 또 서러워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직장 생활을 한지 2년이 되었을 때에 친구에게 남편을 소개받아 결혼하였습니다. 착하고 성실해 보여서 좋았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은 술과 친구를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1990년 3월, 권사님의 전도로 우리 교회에 나와서 결신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늦은 귀가 때문에 힘이 들어 혼자 울 때가 많았지만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할 때면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95년 5월 어느 날, 둘째 오빠가 음주운전을 한 사람의 차에 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6시간을 달려 전남 순천에 있는 병원에 도착해서 오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오빠의 양 손과 발이 침상에 묶여 있고 코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운전자는 이미 사망했고 생존한 다른 사람도 오빠와 같이 중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오빠의 뇌가 다 망가져 회복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장 목을 절개하여 폐까지 산소호흡기 호스를 연결해 꽂는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지금 결정하라고 채근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29살, 큰오빠는 33살이었고 아빠 엄마는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시골 농부이셨습니다. 큰오빠는 사방팔방으로 사고경위를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부모님 역시 도움이 되어줄 누구 한 사람, 돈 많은 친척이나 힘과 능력이 있는 지인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8살 아들과 5살 딸을 동생에게 맡기고 보름씩 부모님과 번갈아 가며 오빠를 간병하였습니다.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식물인간이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오빠를 일으켜 세워 몸을 씻기는 등 간병하는 일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해본 적이 없고 본 적도 없던, 목에서 가래를 빼어내는 석션을 할 때마다 무섭고 떨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영 차도가 없었습니다. 잠시 집에 올라와서 밀린 집안일을 하고 세금을 내고, 그리고 남은 돈을 가지고 병원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아들과 딸이 제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자녀를, 그 손자와 손녀를 시어머니가 잘 돌봐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시어머니는 위로의 전화 한 통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어머니가 이해가 안 되고 섭섭한 마음에 더 심신이 고달팠습니다. 덩달아 남편도 미워졌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의 도움만 바랄 뿐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저는 단장의 고통 중에, 요나의 기도를 생각하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빠가 사고를 당한지 43일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오빠가 의식이 회복되고 사고 순간을 떠올렸는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치려는 몸짓을 하였습니다. 저는 놀랍고 기쁜 마음에 한 걸음에 간호사실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틈틈이 오빠에게 찬송가와 설교말씀을 들려주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오빠를 간병하는 동안 제 몸무게가 8㎏이나 줄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지고 시어머니 눈치를 안 보면서 오빠 간병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고 또 남편에게까지 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당신을 사랑하고 아이들도 너무나 사랑하지만, 지금은 오빠를 살리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말하며 이혼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왜 그 무거운 짐을 당신 혼자서 다 지려고 하느냐, 나와 아이들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냐?’고 물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자주 순천에 내려와 같이 오빠를 간병해 주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큰 힘이 되었고 고마웠습니다.



 



입원한지 1년이 되자 병원에서 더 이상은 할 것이 없다며 장애 2급 판정을 내리고 퇴원을 시키므로 해남의 친정집으로 오빠를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여전히 대·소변을 갈아주고 몸을 닦아주는 등의 간병을 해야 했습니다. 많은 빚, 지친 심신, 치매 걸린 할머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아빠와 엄마…. 그럼에도 친정 식구들은 좀처럼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요지부동 전도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렇게 14년이 지나서 더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큰오빠가 사고를 당하여 위독한 상태로 광주의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있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하는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 한 번 뜨지 못하고 말도 한 번 하지 못한 채 사고 13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처절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큰일을 치르고 난 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힘을 받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친정과 시댁 식구들을 전도하였습니다. 전도와 저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오빠의 병고와 큰오빠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사람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우상숭배가 헛되고 미신을 따르는 일이 허망한 일인 것을 알게 된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이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동네 교회에 가서 결신을 하고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먼저 천국에 가셨고, 아버지와 오빠와 동생은 우리 교회 안산성전에서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생을 얻고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안양성전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완고하던 시어머님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난 23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참으로 다사다난했고 힘든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없었다면 한 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 해주시고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시누이들과 제 며느리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두 구원해 주시므로 양가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지게 될 것을 생각하며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