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019.01.06]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동안 ... 안종태2019-01-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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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동안

변함없이 저희 가족과 함께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안 종 태



 



▶저는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고향 마을에 교회가 없었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면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해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사립학교였는데, 매주 월요일마다 목사님이 오셔서 한 시간씩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아기 모세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장면들을 보는 듯 흥미진진하여 다음 시간을 무척 기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작정 혼자 걸음을 걷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고 교회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대천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수산물 가공공장으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중, 하숙집에서 아내를 만났습니다. 당시 아내는 언니와 함께 지내면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은 아내는 그 어떤 일보다 예배와 교회 봉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저에게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아내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처음으로 교회에 갔던 그때 그 시간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교회를 가려면 조그만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데, 저는 언덕에 있는 큰 소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그냥 집으로 되돌아갈까, 교회로 갈까’ 짧은 시간 갈등을 많이 하였습니다. 용기를 내어 교회당에 들어섰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또 이상하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예배시간 내내 얼굴을 한 번 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 본사로 복귀하였습니다. 주일에 집 근처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결혼 전에 아내가 저에게 내건 첫 번째 결혼 조건이 결혼하면 교회에 잘 다니기로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결혼하였으나 제가 약속을 어기고 교회에 가기를 싫어하여 주일마다 아내와 많이 다투었습니다.



 



1985년도에 안양시로 이사를 와서 하나님을 향한 저의 믿음이 크게 진보하고 신앙생활이 발전하였습니다. 옆집에 사시는 구역장님의 열성에 이끌려 우리 은혜와진리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달리 저는 한동안 졸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자 점차 설교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특히 주중예배 강해설교 말씀이 얼마나 은혜롭던지, 직장 동료들에게 설교테이프를 전해주면서 꼭 들어보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구역장 직분을 받았습니다. 퇴근 후 늦은 시간에도 구역예배를 위해 열심히 심방을 다니고 남성봉사연합회에 소속하여 봉사하였습니다.



 



80년대 후반에 한보건설이 연루된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서지구 직장주택조합 조합원이었던 저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내 집 마련의 꿈을 한 순간에 접어야 했습니다. 당시 분당과 평촌 등 신도시 아파트에 대한 청약열풍이 불었지만 저는 주택조합만 바라보느라 청약자격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매년 전세금이 급등하고 이사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심 끝에 직장이 있는 서울 강남까지 출퇴근하기가 상당히 먼 거리인 안산시에 빌라를 분양 받아 이사하였습니다.



 



저희와 같이 구역예배를 드리고 교회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고 계신 구역장님 부부와 여성 집사님의 권유로 저희 부부도 교사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그러한 선생님들을 본받아 가족 휴가도 포기하고 여름과 겨울 수련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을 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족하고 아쉬운 점도 많지만, 수련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무척 보람되고 즐거웠습니다. 전원성전 수양관이 건립되기 전에 수련회 할 장소를 찾아 경기도 일원의 여러 곳을 다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교회학교 봉사를 통해서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던 제 성격도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와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젊은 시절 내 집 마련이 가장 큰 목표였고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 직장이 가까운 서울 강남은 물론이고 서울 근교에 전셋집조차 장만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신도시 아파트를 분양 받은 동료들과 비교해도 상대적인 박탈감이 컸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그러니 서울 근교로 이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당시 주택공사에서 지은 저층 아파트가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포일지구에 있는 주공아파트 한 채를 전세를 끼고 어렵게 매입하였습니다. 중간에 IMF사태로 한 때 아파트값이 폭락하기도 하였지만 10년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재건축이 완료되어 저희가 그토록 바라던 아름답고 튼튼한 새 아파트에 입주하였습니다.



 



첫 직장은 일이 많아서 항상 퇴근이 늦고 또 휴일에도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회식이 잦아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저는 직장내 신우회에서 총무를 맡아 섬기며 믿는 자의 본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더 안정적이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도록 섭리해 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어려운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저희 집안은 일 년에 한 번씩 사촌 형제들이 고향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데, 제사에 참석하는 문제로 믿지 않는 형제들과 저와의 사이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비록 제사상에 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많이 불편하고 괴로워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제가 제사에 참석한 후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졸음운전으로 인해 큰 사고를 겪었습니다. ‘꽝’하는 소리에 깨어보니 에어백이 터져서 앞이 안 보이는 대형사고였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사람이 다쳤으면 어떻게 하나’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차에서 겨우 내려 살펴보니 제 차가 중앙분리대와 반대편 가드레일에 충돌한 후 튕겨져 차 앞부분이 완전히 망가진 채 도로 한복판에 놓여있었습니다. 차를 폐차할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제 몸에는 상처 한 군데가 없었습니다. 아찔한 2차 사고의 위험까지 있었는데도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사고 수습이 잘되었습니다. 사고 후 저는 형제들에게 앞으로는 아예 제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담대히 선언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과 같이, 저와 같은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신실한 아내와 하나님의 은혜로 저희 가정이 믿음의 가정으로 굳건히 세워졌습니다. 딸은 예수님을 잘 믿는 청년과 결혼하여 손자와 손녀를 낳고 주님을 잘 섬기는 복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큰 아들도 며느리와 함께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도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지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 저희 부모와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불의하고 미련한 저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자유케 해주신 하나님, 저희 가족을 품에 안으사 사랑과 은혜로 함께 해주시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