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죄의허상2017-03-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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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일이다.

어느 날 달 밝은 저녁에 선생님도 안 계시고 날은 더워 공부하기에 지친 글방 아이들이 외 서리 가지고 의론이 돌았다.(그 당시 순박한 농촌에서는 이런 아이들의 장난이 왕왕 있었다.)

이웃 동리 외밭을 찾아 간 아이들이 먼저 재치있는 아이 하나를 정탐꾼으로 삼아 원두막에 보내어 외밭을 수직하는 주인 영감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마침 주인 영감이 목침을 높게 베고 자고 있었다. 정탐꾼 아이가 안심하고 외를 따라고 동무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이 일시에 외밭에 기어들어가 외를 따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 정탐꾼 아이가 영감을 들여다보니 머리에 탕건을 쓴 채로 코를 골고 잠이 깊이 들어 있었다. 장난끼가 생긴 이 아이가 영감의 탕건을 살그머니 벗기어 제 머리에 쓰고 춤을 너울너울 추었다.

외를 따던 아이들이 이를 보고 주인 영감이 잠이깨어 일어난 줄 알고 질겁을 하여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탐꾼 아이도 동무들이 급히 달아나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놀라서 탕건을 쓴 채로 뒤따라 뛰었다. 얼마간 달아나다가 아이들이 뒤돌아보니 어스름 달빛에 탕건을 쓴 영감이 죽자구나고 뒤를 쫒아 오고 있지 않는가. 이를 보고 붙잡힐세라 아이들이 더욱 힘을 내어 달아나고 뒤따라가던 정탐꾼 아이도 이를 보고 필시 자기를 잡으려고 누가 쫒아 오는가 보다 하고 정신없이 뒤쫓는다. 이 모양으로 쫒거니 쫓기느니 죽자 살자 5리 길을 내빼서 기진맥진하여 서당에 당도하고 보니 탕건 쓴 사람은 주인 영감이 아니고 바로 정탐꾼 동무 아이였다.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넌센스 극이 왜 벌어졌을까? 아이들이 주인 몰래 외를 땄다는 죄의식이 저들로 하여금 공포심에 떨게 하고 그 두려움이 탕건의 허상에 쫓기게 하였던 것이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 8:6)하였다. 육신을 쫓아 사는 세상 사람들이 육신의 소욕으로 쫓아오는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죄에 쫓기고 사망에 떩고 있지 않는가. 어떤 신학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인간 일평생은 죄를 지으면서 사망을 바라보는 공포의 생애다>라고.

우리 크리스천은 어떤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그리tm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런고로 죄의 대가로 오는 사망과 저주는 우리와 상관이 없고 생명과 평안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나야 마땅하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옛사람 그대로 정욕을 쫓아 사는 크리스천이 있다. 그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허상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고 사망을 바라보면서 죄에 쫓기는 넌센스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죄와 사망의 허상에서 눈을 돌려 다시 한번 담대하게 십자가를 통한 자기 실상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던 도중에 예수님을 둘러싼 수많은 무리가 있었지마는 오직 예수님의 실재에 접한 사람은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 한 사람뿐이었다. 만일 사람이 예수님의 실재에 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님 곁에 바짝 밀려와서 접촉하였더라도 아직 변화받지 못한 채 그대로 있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영의 생각을 떠나서 육신의 생각을 쫓는다면 그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적 실상(實狀)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