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마지막 단장(端裝)2018-10-1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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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미국에서 박 목사님이 귀국하시어 지난날 함께 심방하면서 있었던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중 한 가지를 기념 삼아 적어 볼까 한다.

 

어느 월요일 오전 중에 봉천동 구역장이라면서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교회 구역 성도의 남편이 어젯밤에 죽었는데, 폐병으로 오래 앓다 보니 가세가 기울어졌고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시체를 그냥 눕혀 놓고 울고만 있다 한다. 교회로 전화를 걸어도 월요일이라 교역자가 아무도 없어 부득이 장로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니 봉천동 상가로 속히 와 주셔야 되겠다 한다.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서울 지리도 어둡고, 더구나 시체를 별반 만져 보지 못하였으니 딱한 노릇이다. 좌우간 곧 가겠노라 대답은 해놓고 나 혼자서는 자신이 없어 허둥지둥하다가 마침 박 장로님을 아파트 현관에서 만나 이를 상의하였더니 같이 가주마 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 당시 박 목사님이 장로로 있을 때다. 이래서 두 사람이 택시를 잡아타고 상가로 달려가니 관악산 밑 조그마한 오막살이 집이다. 죽은 시체를 아무도 없는 방에 그냥 둔 채 옆방에서 40세 안팎의 아주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울고만 있었다.

 

이 집 형편인즉 과거 시내에서 장사를 하여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지내다가 17년 전 남편이 폐병으로 눕게 되어 오랜 병상에서 가산을 탕진하고 관악산 밑으로 온 것은 뱀을 잡아 환자에게 먹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오랜 병상에 시달리다 보니 일가 친척도 서로 원망과 불평으로 윤기가 다 떨어지고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게 된 신세이다. 시체가 놓인 방문을 여니 어두컴컴한 방에 천장은 내려앉아 이마에 닿고, 입다가 내버려둔 헌 옷가지가 여기 저기 널려 있는데 시체만 처량하게 누워 있다. 방에 들어서려 하니 시골 초당에서 메주 뜨는 냄새랄까, 퀴퀴한 악취가 숨을 꽉 막는다. 박 장로님과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한참 숨을 내쉬다가 방에 들어서서 시체를 덮어 둔 이불을 젖히니 얼마나 여위었든지 갈비뼈만 앙상하고 얼굴은 때 투성이가 되어 있다. 박 장로님이 시체의 내복을 벗기면서 온 전신을 알코올로 닦아내자고 한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얼굴만 닦고 옷을 갈아 입히고자 하였더니 마지막 가는 길이니 전신을 깨끗하게 해주자고 주장하셨다. 내가 시체의 다리를 들고 박 장로님은 알코올을 탈지면에 묻혀 온 전신을 닦아내었다. 그리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빗겨 베개 베여 고요히 누이고 온 방안을 청소해낸 후 향불을 피워 놓으니 시체가 죽은 것 같지 않고 자는 듯하다. 그렇게 험하던 시체도 마지막 단장을 깨끗이 하고 나니 추한 것도 없이 편안히 잠들어 있다. 나는 이것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죄로 더러워지고 고된 인생살이에 만신창이가 되어 주님 앞에 설 때, 우리 주님은 보혈로 씻어주시고 세마포 옷으로 단장을 시켜 주실 것이니 추함도 사라지고 더러움도 없어져 성결하고 아름다운 하늘 권속이 되어 주님 보좌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겠구나!’ 가만히 생각하니 다시 한 번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 박 장로님과 나는 교회 묘지에 유족과 함께 가서 장례를 치러 주고 영구차로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내렸다. 내가 집으로 가려 하니 박 장로님이 나를 부른다. “금시 차에서 내리는 순간에 유족 중 한 사람이 거마비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주어 도로 돌려줄 여가도 없이 차가 떠났으니 조 장로님이 이것을 받으시오.” “아니오, 박 장로님께서 많은 수고를 했으니 장로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나는 뿌리치고 와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에 아파트 현관에서 박 장로님이 웃으시며 어제 상가에서 받은 봉투를 꺼내 보이며 “어제 이 봉투를 조 장로님께 드렸다면 실례가 될 뻔했습니다.” 한다. 받아보니 봉투 속에는 거마비가 아닌 동회에 제출할 사망계만이 들어있었다. 불쑥 웃음이 터져나와 껄껄 웃고 있으니 한강에서 불어오는 봄 바람이 훈훈히 내 얼굴을 스쳐가고 수양버들도 재미있다는 듯 실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