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시어머니의 슬픈 얼굴2018-09-2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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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5, 16도를 오르내리는 어느 추운 겨울날 전도사와 나는 구역예배를 마치고 구역장과 부구역장이 함께 새로 나온 결신자 카드를 들고 초도 심방을 나갔다.

 

찾아간 집은 70여 세의 할머니 댁이다. 상당히 잘 사는 집인 듯 큼직한 대문이 믿음직스러워 구역장은 우리 구역에도 이런 부잣집이 나왔다면서 기뻐한다. 초인종을 누르니 가정부인 듯한 소녀가 나온다. “우리는 교회에서 심방 나왔는데 할머니 계십니까?”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나왔다. “들어오세요” 할머니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이불을 젖히고 백발의 할머니가 반가이 맞이한다. 인사를 마치고 “할머니 교회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등포에 사는 이가 하도 권하여 지난 주일 교회에 따라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가 보시니 어떠합니까?” “무엇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마음이 기쁘고, 예수를 믿어 보고 싶어요.” “계속 교회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막 예배를 드리려 하는데 갑자기 누가 영창 문을 벼락치듯 열어 제치고 고함을 꽥 지른다. 모두 깜짝 놀라 쳐다보니 사십 남짓한 여인이 모난 얼굴에 눈을 곤두세우고 버티고 서 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당신들 누구의 승낙을 받고 이리 들어왔소?” 다그쳐 힐책한다. 안중에는 시어머니나 누구나 없는 모양이다. 부득이 내가 대답했다. “누구의 승낙 받고 온 것이 아니라 댁의 할머니가 지난 주일 우리 교회에 나오셨기에 교회의 규례에 의해서 전도사님과 장로가 심방 왔습니다.” 여인은 아니꼽고 더럽다는 어조로 힐난했다. “저 늙은이가 주책이 없어 공연히 남의 꾀임에 빠져 교회에 나간 모양인데 우리는 예수는 못 믿소, 그러니 빨리 나가시오.” “여보시오, 기왕 왔으니 축복기도라도 하고 가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웃는 얼굴로 넌지시 권유해 보았다.

“축복이고 무엇이고 필요 없소. 빨리 나가시오.” 마치 거지를 내쫓듯 추상같이 호령한다. 내 집에 온 손님 대접이 이럴 수가 있나 싶어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니 무안과 슬픔에 잠긴 그 눈에는 애원의 호소가 서려 있었다. 만약 내가 그 여인을 책망하고 나면 내 속은 후련하겠지만 우리가 가고 난 뒤 저 할머니가 자부에게 받을 구박을 생각하니 차라리 참고 그냥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자, 일어섭시다.”하며 말없이 문밖으로 쫓겨났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문밖에서 멍청히 서 있으니 쌩쌩 찬바람은 한결 더 사납다. 외투 깃을 올리니 문득 김 삿갓(金笠)의 시가 생각났다. “스무 나무 아래 설운 길손이 망한 놈의 집에 쉰 밥을 먹는구나!(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나도 분풀이로 한 수 하고 싶지만 시인이 아니고 장로라 ‘주여, 저 영혼을 불쌍히 보소서!’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세도인심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돈냥이나 벌어 놓으니 교만이 차서 늙은 시어머니는 식객(食客)으로밖에 안 보이고 내 위에는 사람 없다는 독선이고 보면 전도사나 장로쯤은 내 집에 동냥 온 거지로 보일 수밖에.

 

아, 그 시어머니의 슬픈 얼굴. 며느리에게 이 서러움을 당해도 말 한마디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듯한 그 회한(悔恨)에 찬 눈동자.

 

만감이 교차하는 내 뇌리에 작년 봄 용산구에 심방 갔다 본 일이 떠오른다. 70세 할머니인데 목병이 나서 수술하면 살고 그냥 두면 죽는다는 분이었다. 천리타향 울산 땅에서 도로공사 직원으로 박봉생활을 하던 그 며느리가 이 소식을 듣고 푼푼이 모은 70만 원을 몽땅 들고 와서 시어머니의 목병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도 못 잊어서 머물러 간호하며 심방 갔던 우리와 같이 시어머니 완쾌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올리던 헐벗고 초라한 그 여인. “장로님, 돈이야 또 벌면 있잖아요. 어머님이 살아났으니 기뻐요.” 희열에 찬 그 눈동자! “장로님, 우리 자부 덕택으로 나는 살아났습니다.” 이슬 맺힌 눈으로 자부를 바라보던 늙은이의 감사와 행복에 찬 그 얼굴! 진실로 인간의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아니함을 새삼 느낀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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