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죽으면 살리라2018-09-0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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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達磨大師)가 벽을 향하여 9년 동안 참선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문밖에 신광(神光)이란 자가 찾아와서 도(道)를 배우고자 간청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였다. 신광은 문밖에서 밤을 새우며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공교롭게도 눈이 펑펑 쏟아져 무릎까지 쌓였다. 신광은 죽을 각오로 왼쪽 팔을 베어 달마에게 내밀며 구도(求道)의 굳은 결의를 보였다. 그러자 비로소 달마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엇을 구하려느냐?” “마음이 불안해서 안심을 얻고자 하나이다.” 신광은 솔직히 심증을 털어놓았다. 사실 신광은 학문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나 항상 마음에 번뇌가 떠나지 아니하였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안심케 하리라.” 달마는 연민에 찬 눈동자로 신광을 바라보았다. 몸의 한 구석에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줄 생각했던 신광은 졸지에 마음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내보일 수 없는 이마음! 신광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지를 못하겠나이다.”떨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너를 위해 이미 안심시켰노라.” 달마는 고요히 눈을 감았고 신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광은 이후로 혜가(慧可)란 법명을 얻었다. “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만 가지 법도에 허물 할 것이 없다(一心不生 萬法無咎).”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자기 중심으로 좋다, 싫다, 밉다, 곱다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번뇌가 일어날 까닭이 없다.

 

장자(莊子)는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내가 없다(至人無己).”라고 했다. 도통한 사람은 사심(私心)이나 사욕(私慾)이나 자기과시욕(自己誇示慾)이나 아집(我執)이 없다는 말이다. 과연 공자(孔子)는 사사로운 뜻이 없고 기필함이 없고 고집함이 없고 나라는 것이 없었다 한다(子絶四 毋意毋必 毋固毋我). 사사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꼭 이루고자 하고 꼭 이루고자 하면 억지로 고집하게 되고 고집하게 되면 나를 내세우게 되는 법이다.

 

공자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하니 성현다운 면모가 약여하지 아니한가? 누구라도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찾아보아도 있지 아니한 이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내가 그대로 살아 있으니 낭패가 아닌가?

 

사람이 사심이나 공명심이나 자기과시욕이 없고 또한 집착을 떠난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화평스러울까?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진실로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일 것이다. 인간은 자고로 도를 닦고 수양을 하며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다. 돌감나무를 아무리 잘 가꾸어도 참감이 열리지 아니함같이 죄인이 아무리 수양을 한다 해도 의인의 탈을 쓴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참으로 양심이 있다면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고 누구라 외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셨다. 죽은 돌감나무를 보고 아무리 돌감 열매를 맺어라 해도 맺을 리 만무하다. 사람이 죽으면 사심도 공명심도 자기과시욕도 사라진다.

 

우리가 죄를 없애고자 힘쓰기 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내 안에서 살아 주신다(갈라디아서 2:20)

 

그러므로 기독자는 침례의 세례가 필요하다. 침례는 악한 행위만을 회개케 하는 것보다 죽은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여 죽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침례는 장사 지낼 필요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러함으로 나는 죽고 죄의 욕심도 사라진다. 동시에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내 속에 들어와 죽은 나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요한복음 3:5)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베드로후서 1:4). 거듭난 사람은 자연히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기 마련이다(갈라디아서 5:22)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진실로 중생(重生)은 기독자의 가장 큰 축복이다. 참 크리스천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죽지 아니한 크리스천은 접붙여졌어도 옛 가지가 그대로 살아있는 돌감나무와 같다. 참감나무로 접을 붙였으되 옛 가지가 살아서 돌감이 그대로 열린다면 본래의 돌감나무와 무엇이 다르냐?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옛 사람이 그대로 살아 있다면 무엇이 유익하랴?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능히 십자가에 죽을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린도후서 4:12)고 바울은 외치고 있다. 우리가 죽으면 살고, 살면 죽는다. 죽자! 내 이웃을, 내 교회를, 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먼저 죽자! 이것만이 내가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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