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소망2018-09-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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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의 미래를 믿을 수 없었던 인간은 수용소에서 멸망해 갔다. 미래를 잃음과 동시에 그는 의지할 바를 잃고 내적으로 붕괴하고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추락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이윽고 죽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이와 같은 자포자기 및 자기 붕괴와 미래에 대한 상실 사이에 어떻게 본질적인 연관이 존재하는가가 내 눈앞에서 한번 극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의 죄수 대표는 제법 알려진 외국의 작곡자겸 희곡 작가였다. 그는 어느 날 나에게 은근히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 의사 선생, 난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최근 나는 기묘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 어떤 음성이 들려오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무엇이나 희망이 있으면 말을 하라는 것이에요…, 즉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묻는 대로 대답을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무엇을 물었는지 아시오? 나는 나에게 있어 전쟁이 언제 끝나는가 무엇보다 궁금했던 것이오. 의사 선생님, 내가 한 이런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즉 우리가 언제 수용소에서 해방이 될 것인가, 따라서 언제 우리는 고뇌에 찬 생활을 그만둘 수 있을 것인가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나는 그에게 꿈을 언제 꾸었느냐고 물었다. “1945년 2월 이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더냐고 물었다.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5월30일…”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친구 F가 그의 꿈에 대하여 나에게 말했을 때 그는 아주 희망에 넘쳐 있었고, 꿈에서 들은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 꿈 속의 목소리에 의하여 예언된 날짜는 자꾸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수용소에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전쟁이 5월 중에 우리를 해방시켜 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5월29일에 F는 갑자기 고열이 나서 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5월30일 – 즉 예언에 의하면 전쟁과 고뇌가 ‘그에게 있어’끝나는 날 – F는 중태에 빠지기 시작하여 드디어 의식을 잃었다. 5월31일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발진티푸스로 죽은 것이다.

 

용기와 낙담, 희망과 실망, 그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 나의 동료 F는 기대하였던 해방의 시기가 맞이 않았다는 데 대한 심각한 실망이 가뜩이나 발진티푸스로 고생하던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의 미래에의 신앙과 의지는 풀어지고 그의 육체는 질환에 쓰러졌던 것이다.

 

이상은 유태인 죄수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 말할 수 없는 학대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정신의학의 권위자 빅터 프랭클 박사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중의 한 부분이다.

 

이와 같이 기대 없는 인간의 삶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희망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희망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내가 병원 심방을 다니며 항상 느끼는 일이다. 아무리 중환자일지라도 병자가 절망하지 않고 생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불탈 때 치유되는 비율이 많고, 환자가 믿음도 없고 병에 이미 정신적으로 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병세가 악화일로로 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4)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영원한 소망을 우리에게 안겨 주신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신다”(로마서 15:13) 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가치추구의 존재이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목표를 향한 소망이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없으면 아무 사명감도 없고, 바람 부는 대로 (風打之竹) 물결치는 대로 (浪打竹) 세월에 밀려 흘러가는 인생이 되고 만다. 양심은 육체의 정욕에 따라 비틀거리고, 정신은 거치른 광야같이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맹자도 “스스로를 해치는 자는 함께 이야기할 바가 못되며 스스로 버리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바가 못 된다(孟子曰自爆者不可與有言也 自葉者不可與有爲也).”하였다.

 

옛날 노인시(老人時)에 이런 글이 있다. “한가한 가운데에 사업이라고 하는 짓이 자리에 티끌을 없애는 일이고 늘그막에 하는 경륜이라곤 화로에 불이 있게 하는 일이라오. 아내는 아이 보는 일이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를 모르고 무단히 허송세월 하지 말라고 자주 안아 보낸다오 (閑來事業席無塵 老來經綸爐有火 家妻不識看兒苦 無端虛送抱送頻).” 인생은 늙어도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한 시다. 그러므로 “인간 생애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라고 칼 힐티가 말했다.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間道夕死可矣).”라고 한 것과 일맥 상통하는 말이 아닌가?

 

우리에게 내일의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선한 목표가 있는 이상에는 살 가치가 있다. 앞날의 소망이 없고 성취 목표가 없는 인생은 죽은 것과 방불하다. 살 소망이 있는 자는 생기가 있고 화기가 있다.

 

썩은 물고기는 휩쓸려 떠내려가지만 산 물고기는 세찬 물결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같이 산 소망을 가진 인생은 낙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하지 아니한다. 가장 악한 판국에서도 반짝이는 가장 좋은 것을 내다보는 것은 소망인 연고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소망은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일장춘몽이라 했다. 진정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5)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시편 3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