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수필

제목성숙한 신앙인2018-08-05 1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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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공자(孔子)에게 맹무백(孟武伯)이 효도를 물으니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하느니라”하였다. 자유(子游)가 효도를 묻자 “근자의 효도는 음식 봉양을 잘 하는 것을 말하나 개와 말도 잘 먹이지 않는가. 부모를 존경하지 않으면 무엇이 다르랴.” 했다. 자하(子夏)가 효도를 물으니 “항상 즐거운 낯으로 부모를 섬김이 어렵다. 일이 있으면 그 수고를 맡아 하고 술과 음식이 있으면 먼저 대접하는 것만으로 어찌 효도라 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

 

부모에게 음식이나 잘 대접하고 수고나 덜어 준다고 완전한 효도가 아니라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존경하며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임을 가르쳤다. “더욱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라(事父母能竭其力).”고 한다. 효도란 부모를 섬기는 데 그 금전적 가치의 다소 등으로 판단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부모에 대한 사랑의 다소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옛날에 출가한 딸과 나이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아버지가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딸에게 부고를 보내고 병풍을 치고서 홑이불을 뒤집어 쓰고 죽은 시늉을 하고 누워 있었다. 그러자 딸이 부고를 받고 황급히 달려와서 통곡하며 슬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는 말이 “아버지, 제가 왔어도 왜 말이 없으신가요? 살아 생전에 집 앞 논 서 마지기 제 앞으로 해주 마더니 왜 그냥 말없이 가셨나요?” 넉살을 부리며 몸부림을 친다. 아버지가 누워서 듣자 하니 평소에 아버지에게 알랑거리던 딸의 소행이 상속에 목적을 두고 한 짓이 아닌가 싶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네 이것아! 뭐라고 했어?”하고 고함을 질렀다. 딸이 깜짝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 “아버지 죽음이 참 죽음이며, 제 울음이 참 울음입니까?” 하더라 한다.

 

어린아이 때는 과자라도 바라서 부모 심부름을 하는 일도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부모의 은혜에 감격해서 사랑으로 길러 주시고 오늘이 있게 하신 부모의 은혜에 감격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효도지 상속이나 바라고 효도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속담에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함과 같다.

 

요한복음 12장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우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져다가 옥합을 깨뜨리어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분 내어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하며 마리아를 책망하였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저는 돈궤를 맡는 자로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고자 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매우 적막감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리아는 예수의 쓸쓸함을 직감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를 위로하고 자기의 마음을 바치고자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리어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예수로 하여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가복음 14:9)”는 칭찬이 나오게 하였다.

 

마리아의 행위야말로 예수를 위한 진실한 사랑의 발로라 하겠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 사욕을 위하여 예수를 섬겼을 뿐이다. 그는 예수로 말미암아 크게 출세해 보려던 기대가 어그러지자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선생을 헌신짝같이 팔아버렸다. 자기의 입신 출세를 위하여서나 병 고치기 위하여서나, 무슨 축복을 받기 위하여서나, 자기 욕망의 동기로 예수를 믿는 자는 조그마한 시험이 오면 결국 이 유다와 같이 주를 배반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축복을 한 없이 내려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축복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부산물로써의 축복이지 복음의 주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을 사랑함에 있고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만 있다 하겠다.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 따른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나 자신을 헌신하였나 에 정비례해서 주님을 만족케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봉사함에 있어서는 헌신의 원리가 능력의 원리이다. 주님께 얼마나 능력 있게 쓰이는가는 헌신의 양으로 측량된다. 많은 헌신으로써 주님께 봉사하면 주님도 또한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이다. ‘안드레 모로아’가 말하기를 “이용 가치가 있어서 사귀는 우정(友情)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다.”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나 동일한 이치이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나 상속을 얻고자 하는 것보다 감사와 사랑이 앞서야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혹 사욕이 그 동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나, 일단 믿음에 들어와 구원을 체험한 이상에는 나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는 데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와도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아니할 때 진실로 성장한 신앙인이라 할 것이다.

 

공자도 “아침에 도를 들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했다. 우리는 세상의 도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들은 자이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사도 바울도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0~21)하였다. 그런고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편 84:10)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다. 우리도 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서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