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완전치 못한 인간의 말2018-06-2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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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란 사상을 담는 그릇이다. 사상은 무한하고 말은 유한하다. 무한한 사상을 유한한 말의 그릇에 담자니 표현의 어려움이 있다. ‘고추가 맵다’ ‘무가 맵다’ ‘마늘이 맵다’등 동일하게 ‘맵다’는 말이지만 달리 특색 있게 매움을 표시할 말이 없으니 한 말로 맵다 할 수 밖에 없다. 마늘이 매운 것을 일본말로는 ‘마늘 구린내가 난다’고 한다.

 

마늘이 풍기는 매운 냄새를 구린내로 표현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어느 여름날 시골 역전의 공중 화장실에 들어갔다 맡아 본 그 악취와 눈의 따가움을 체험하고서는 ‘아, 마늘을 싫어하는 일본 사람에게 마늘의 매운 냄새가 구린내로 느껴지는 것도 일리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말의 표현이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다가 와서 그 낙원을 표현하되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하였다. 사도 요한도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늘로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을 복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표현하였다.

 

바울이나 요한은 천국을 인간의 말로는 형용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 이상 더 표현할 말이 있겠는가? 시인들도 지극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방법을 사용했다.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이 가운데 창조주의 참뜻이 있으니 밝히고자 하여도 말을 잊었노라(此中有眞意 欲辨己忘言).” 한 것이 동일한 취향이다. 그리고 말이란 아무리 좋은 뜻에서 한 것일지라도 흠을 잡고자 하면 잡히기 마련이다.

 

백낙천(白樂天)의 시에 이런 말이 있다. “이치를 따지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진리를 모르는 자요, 진실로 진리를 아는 자는 잠자코 있다는 말을 나는 노자(老子)의 글에서 배웠네. 그러나 만약 노자가 참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5천 자나 되는 도덕경(道德經)을 지었는고 (言者不知知者默 此語吾聞於老君, 若道老君是知者, 綠何自著五千文).” 하고 노자를 꼬집었다.

 

노자의 참뜻은, 지나치게 아는 체하며 따지고 캐고 하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짓일 따름이지 그렇다고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게다. 남의 말을 지극히 협의(狹義)로 해석하거나 내면의 참뜻은 이해하려 하지 않고 표면적 어구에만 급급해서 문제 삼으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오해가 없을 수가 없다. 여기에 인간의 말의 불완전함을 슬퍼 아니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의 말에 담아 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읽는 데도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그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기에 힘써야지, 표면적 어구에 구애되어 자의로 해석한다면 크게 오류를 범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을 큰 무리가 따랐다.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고 했다. 예수님을 큰 무리가 따랐다. 예수님은 이 때에 생명에 관한 떡의 설교를 하셨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하시니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하며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한복음 6:51~66)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물러간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 살을 먹으라’하신 말씀에 놀랐던 것이다. 이 사람이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는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따라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표면으로만 듣고 내면적 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이여!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이요, 바로 생명 그 자체인 것을 가르쳐 주셨건만 사람들은 듣고도 몰랐던 것이다. 선교(禪敎)에서는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 문자란 진리 그 자체가 아니요, 진리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아서 진리인 달은 안 보고 손가락(文字)만 바라보게 되니 사람을 오도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이를 깨닫게 하는 성령을 주셨음을 나는 무한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처음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는데 마태복음 첫 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낳고…” 이 연속된 ‘낳고’에 싫증이 났다. 간결하고 함축성이 있고 한 문장 중에 같은 형용사나 동사가 중복으로 나오는 말이 극히 드문 한문을 읽어오던 터라 성경이 극히 치졸한 문장으로 기록되었다고 느껴졌었는데 내가 은혜를 받고 보니 그 낳고, 낳고가 좋아졌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하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태복음 1:5,6)하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이방 여인이 우리 주님의 조상으로 자녀를 낳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내 눈앞에 그려지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섭리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기독교 주간 신문사) 의 요청으로 신앙수필을 쓴지가 여러 해 되어간다. 본시 천학비재(淺學菲才)라 요행으로 초신자들의 파적(破寂)거리나 되었으면 할 뿐이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이 격려해 주심을 감사하거니와 특히 친절하게도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신 분에게는 세 번 일어나서 절하고 싶은 심정이다. 본래 수필이라는 것이 그때 그때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붓 가는 대로 적는 것이라 가벼운 심정으로 시작한 것인데 막상 쓰고 보니 그리 쉬운 것도 아니다. 남들 잠자는 밤에 끙끙거리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편언척구(片言隻句)라도 과오가 없기를 기하면서 애써왔지만 허다한 실수에 자괴(自愧)함을 더할 뿐이다.

 

그러나 군자는 반드시 미친 사람의 말도 택할 만한 것은 택한다 하였으니, 독자 여러분은 한 단어 한 구절에 너무 구애 마시고 전체 문의(文意)에 있어서 필자의 충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자 다윗이 만승 천자로서 체통이나 위신은 아랑곳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를 본 그 아내 미갈이 비웃고 책망하였다. 이 때 다윗이 미갈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택하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감격해서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희희낙락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스스로 비천함을 드러내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던 다윗을 나는 배우려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린도전서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