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천수답 신앙2018-10-2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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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심방을 다니다 보면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는다. “교회에서는 너무 예배가 잦아요. 주일예배, 삼일예배, 구역예배, 철야예배, 금식기도예배, 무슨 단합예배 등등 정신차릴 여가가 없습니다. 주일이나 지키면 될 일이지 꼭 이렇게 해야만 잘 믿는 것인가요?”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나의 평생의 애환(哀歡)이 주마등(走馬燈)같이 뇌리를 스쳐간다. 사실 인생을 안이(安易)하게 살아가려면 얼마든지 안이하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 다시 못 사는 인생인지라, 값지게 살자면 아무래도 수고의 떡을 먹어야 한다.

 

1930년대는 우리 나라가 일제(日帝)치하에 있어 가혹한 수탈정책으로 농촌이 극도로 피폐하여 농민들이 살지 못해서 남부여대 하여 만주로, 일본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던 시절이었다. 이를 근심한 우국지사들이 “청년들이여, 농촌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소리가 높았다.

 

나도 그 당시 귀농대열의 한 청년으로 시골로 내려가서 산지개간을 하며 글 모르는 농민들에게 야학을 가르치느라 애쓰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틀못 도감 김씨가 찾아와서 주름진 얼굴에 한숨 섞인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틀못은 이제 소용없는 못이 되었어요. 해마다 유사(流砂)가 내려와 못이 다 막혀버렸으니 몽리 면적 5백 마지기가 이제는 완전 천수답이 되어버렸지요. 거기에다 매년 가뭄이 드니 계속 흉작이라 농사지을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나도 아이들 데리고 북간도로나 떠나야 될까봐요!” “그러면 유사를 파내고 못을 수축하면 될 것 아니오?” “농민 대다수가 두서너 마지기의 영세농가요, 대지주는 동척(일본이 우리 농촌을 수탈하기 위하여 세운 회사)이고 일본인들인데 아예 협조할 생각이 없으니 그 넓은 못 면적을 10자 내외 파내어야 되는 공사를 누가 감당하겠단 말이오?” 허탈에 빠진 못 도감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나는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다 힘을 합하여 못을 다시 팝시다.” 사실 내 논이라고는 두 마지기밖에 없지마는 농민들이 이농(離農)할 것을 생각하니 좌시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나는 못 도감을 데리고 우선 일본인 대지주 구니모도를 찾아가서 이를 상의하였다. 그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비웃는 오조로 이렇게 말했다. “못 주위 산들이 벌거숭이가 되어 유사가 내려오니 못을 파 봐야 또 막힐 것이고 경비도 많이 들게 생겼으니 차라리 그대가 뜻이 있다면 먼저 사방공사나 하시오.” “여보, 사방공사는 국가시책으로 할 일이오. 우선 못이나 다시 파 놓고 유사 막을 궁리를 해보아야 안 되겠소?” “허허, 효과도 없는 그 일에 투자를 하느니 차라리 그 돈 가지고 수리 좋은 곳에 땅을 사면 될 것이 아니겠소. 젊은 청년!” 어디까지나 농조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돈만 아는 얄미운 자식!” 나는 분연히 일어나 면장을 찾고 유지들을 방문하여 협조를 간청했다. 그러나 신통한 방향이 없어 할 수 없이 못 취회(聚會)를 열고 개량계를 조직하여 못을 파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의 만용이라고 비웃고 쑥덕공론을 놓았으나 굴하지 않고 못 도감 김씨와 동지가 되어 천신만고를 겪으며 이듬해 봄까지 공사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일은 일이 어려울 때는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더니 거의 완성단계에 가서는 너무나도 협력하고 나서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새삼 느꼈으나 기뻤다.

 

특히 준공식 날에는 다 파 놓은 못 바닥에서 농악을 울리며 흥겹게 노는 중에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반대하던 사람들까지 함께 춤을 추었으니 말이다. 그 후 논들은 완전 전전후 수리답이 되었고, 몇 해 전 가을 이곳을 지나가며 바라보니 옥야만경에 금파가 금실거리는 풍요로운 들이었다.

 

나는 오래 전의 일을 회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져옴을 느꼈다. 이제 새삼스럽게 틀못 도감의 주름진 얼굴이 내 눈에 떠오른다. 농업용수를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지하여 흉풍을 전적으로 하늘에 기대고 속수무책 바라보고만 있어야 되는 천수답. 유사 파내기가 싫어서 폐못이 되고 보니 몽리 면적 5백 마지기가 천수답이 되었다고 비통해 하던 틀못 도감.

 

곰곰히 생각해보니 주일 성수나 하고 안이하게 믿는 믿음은 천수답 신앙이 아닌가.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가뭄(시험)을 이겨나갈 힘은 없고 “주여!”하며 울고만 있어야 되니 말이다.

 

농부가 못을 판다, 보를 막는다, 유사를 걷어낸다, 수로를 만든다 하여 전천후(全天候)수리답을 이룩하는 것처럼 우리 성도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2~13) 함같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며 찾고 찾아 큰 믿음의 힘을 얻어 전천후 신앙을 이룩하고, 어느 때 어디서나 닥쳐오는 시험과 환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이 말세에 믿응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돌을 마르다에게 옮겨 놓으라 하시고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도 나사로를 동여맨 베와 수건을 역시 마르다에게 풀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는 장애와 곤란의 무덤 돌을 내가 스스로 제거하여야 하고, 구원받은 성도라도 끊기 어려운 죄악의 습관과 세상 유혹의 붕대를 끊어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도 내가 마땅히 할 일임을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또 주님께서는 친히 이에 모범을 보이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브리서 5:7~10)

 

이와 같이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사도 중 사도인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라고 하여 신앙생활은 끝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각기 여러 가지 모이기 힘든 이유야 있겠지만 전천후 신앙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옛글에 “사람이 한 번 해서 능하거든 나는 열 번 해서 능하게 하고 사람이 열 번해서 능하거든 나는 백 번해서 능하게 할지니 환하게 얼음 녹듯하고 기쁘게 이치가 술술 풀리는 것은 오래 되면 절로 얻어지는 것이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人一能之 我十能之 人十能之 我百能之 渙然氷釋 怡然理順 久自得之 非遇然也)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복음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