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제일은 사는 것이다2017-12-2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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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

거구로 매달아도 세상이 낫다.”

소여(小輿) 대여(大輿)에 죽어가는 것이 헌 옷 입고 볕에 앉았는 것만 못하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일가는 욕망임을 보여 주고 있는 말들이다.

 

어느 마을에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쇠하여 골골거리며 항상 누워 있어 세상의 낙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새해가 되어 아들 친구가 찾아와서 세배를 드리고 물러가 그 아들 방에서 놀고 있었다.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말했다.

얘야! 지금 왔던 네 친구 그 놈의 소작을 옮겨라.”

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이놈아, 옮기라면 옮길 것이지 무슨 잔소리냐! 그 놈 몹쓸 놈이야.”

아들이 돌아와서 의아한 표정으로 친구를 보면서 물었다. “이 사람아! 우리 아버지께 어이 하였기에 자네 부치는 논 소작을 옮기라는 엄명을 내리시나 이거 큰일난 것 아닌가?”

글쎄 금방 세배 가서 어르신께 100세 장수하시라고 인사 드린 것뿐일세.”

이 사람아! 큰일났네. 우리 아버님이 100세이시니 금년에 돌아가시라는 말 아닌가? 다시 가서 인사 여쭙게.”

 

아들 친구가 다시 노인에게 가서 어르신께서 또 100세 장수, 장수하시기를 빕니다.”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영감이 아들을 부르더니 그 사람 소작을 도로 주라고 하더라는 옛 얘기이다. 100세를 장수하고서도 더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끈질긴 욕망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는 대개 마지막으로 한 번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보고 교수대로 들어간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그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삶을 꾸려오다 그것들로부터 영원히 고별 당하려는 찰나, 흐느끼도록 사무쳐오는 생명에의 아쉬움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까지 삶에의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슬프고 괴롭더라도 살고 싶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어도 살고 싶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산다는 것은 모든 것 위의 최고의 바람이요,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최저의 기본 욕구이다.

말없는 청산이요 태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 없이 늙으리라.”

위의 시조는 우계 성혼 선생의 시이다. 도학자인 그는 없다. 없다로 일관하여 인간의 시비 분별을 배제하고 자연과 더불어 자연과 뜻을 담았다. 여기에는 일체의 영욕이 있을 수 없고 숭고한 삶만이 있다.

천산에 새는 날아가 버렸고

오만 길가에 사람 흔적도 사라졌다

외로운 배에 도랭이 삿갓 한 저 늙은이

홀로 차가운 강에 눈을 낚고 있구나

千山鳥飛絶萬經人縱滅

孤舟蓑笠翁獨釣寒江雪

 

 

눈은 펑펑 쏟아지고 지저귀는 새도 날아가버렸다. 오가던 사람도 가고 없다. 천지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아무데도 숨쉬고 살아 있는 흔적이 없는데 오직 외로운 배에 고기 낚는 늙은이의 숨결만이 살아 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여기에 무슨 소용인가? 이 늙은이의 숨결마저 없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온 누리에 이 늙은이의 한 생명이 살아 있으니 그 산도 강도 살아 숨쉰다. 숭고함을 지나쳐 생의 외경(畏敬)마저 느끼게 한다.

 

산다는 것이 모든 것에 앞서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런고로 옛 글에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눈먼 거북이가 만 년을 물속에서 헤매다가 부목을 얻어 물 위로 고개를 든 것 같다.”는 말과 같이 생을 얻는다는 것이 귀중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근간 행해지는 인간의 생명 경시의 사회 풍조는 있을 수 없는 일다.

 

성경에도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오직 사는 것 그 자체가 귀하다. 그런데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것을 얻으려고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정작 중요한 사는 것은 소홀히 하는 일이 많다. 가령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명예를 얻고 등등 이런 일에 노심초사하며 좇아 다니는 만큼 자기 삶을 돌보았다면 인생에 무슨 비극이 이다지도 많이 생겨났겠는가? 사람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할 때가 많다. 사는 것이 목적이요, 부귀영화는 수단이다. 그럼에도 부귀영화를 추구하다가 삶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생을 보전하는 자는 욕심이 적고 몸을 보전하는 자는 이름을 피하느니라.”하였다.

혹시 살기 위하여서는 의식주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고 질문하리라. 그렇다. 먹을 양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살 집만은 있어야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양식도 옷도 필요 이상으로 쌓아 두어야 되고, 집도 고대광실이어야 하니 문제가 생긴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는 하나님도 인정하시지 아니하였는가.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1~33)”하였다. 이러므로 삶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산다 하더라도 불안 공포에 쫓기는 삶이 되어서야 참 삶이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사람에게는 의식주가 충족이 되어도 불안과 공포가 따라다니며 편히 살 날이 없다. 이것은 인간이 지고 있는 숙명이다.

 

아득한 옛날, ‘불안(不安)’이란 신이 땅을 다스리는 신에게서 흙을 빌려다가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생명이 없기 때문에 활동을 하지 못했다. ‘불안신은 다시 영혼을 맡고 있는 신에게 가서 영혼을 빌려다가 사람 속에 불어 넣었다. 그랬더니 생명과 호흡이 있는 사람이 되어 보기에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땅의 신과 불안의 신이 그 사람을 자기가 가지겠다고 시비가 났다. 부득이 세 신은 가장 높은 신에게 나아가 이 세 신 중에 누가 이 사람을 차지해야 되는가를 판결해 달라고 했다. 가장 높은 신은 판결을 내리기를 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불안의 신이 차지하고, 죽은 후에는 몸뚱이는 땅의 신이 차지하고 영혼은 영혼의 신이 차지하라 하였다 한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 희랍 신화이다. 인간이 아무리 부귀와 영화는 누린다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가 들어차 있다면 그 삶이 행복하다 할 수 없다. 불안과 공포를 짊어지고 난 인생은 제 키의 한 치도 임의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불안과 공포를 면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해보자고 예술이 생기고 철학이 생겼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는 미결(未決)의 장으로 남아 돌아 갈 뿐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하셨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베드로전서 5:7)하셨다.

 

그러므로 이 불안과 공포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해소 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불안과 공포, 염려, 근심을 주께 맡기고 홀가분한 심정으로 살아가면 된다. 그 위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가 경주 98호 고분 속에서 느낀 일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한 솔로몬이 말이 절실하게 실감이 되었다. 내가 피라미드를 쌓아 올린다 하더라도 긴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제일은 사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는 것만이 최고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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