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접목(接木)과 중생(重生)2018-04-0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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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을 경영하면 자연히 접목(接木)을 많이 하게 된다. 왜냐하면 씨를 심어서 성장한 나무는 대개 우량종이 나오지 않고 돌나무가 되기 쉬우므로 수종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접목을 하게 된다.

 

가령 복숭아씨를 심어서 1,2년 성장한 돌복숭아나무를 밑둥치에서 끊어버리고 이것을 대목(臺木)으로 삼아 우량종 복숭아나무의 지난해 햇순가지를 접수(接穗)로 하여 붙이면 접수에서 새눈이 발아(發芽)하고 또 대목에서도 발아하는데, 대목에서 난 눈은 잘라버리고 접수에서 난 눈만 가꾸면 그것이 자라서 우량종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어느 해에 내가 복숭아나무 접목을 했는데 한 나무가 어찌나 무성하게 잘 자랐는지 삼 년만에 과실을 많이 맺었다. 그런데 이변(異變)이 생겼다. 가늘고 허약한 가지에서는 좋은 과실이 듬성듬성 열리고, 강하고 무성한 가지에서는 먹지도 못할 돌복숭아만 가득 열렸다. 이상해서 접붙인 자리를 살펴보니 이미 대목과 접수가 한덩어리가 되어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돌가지가 난 곳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접수와 대목이 연결된 부분에서 가지가 나와 있었다. 필시 대목에서 난 눈을 접수에서 난 줄 알고 잘라버리지 않고 그냥 둔 것인 듯하다.

 

삼 년 동안 헛수고를 한 셈이다. 애석했지만 돌가지를 당장 쳐버렸다. 그리고 가늘고 허약한 가지를 몇삼 년 잘 가꾸었더니 크게 무성해져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되었다. 본래 접목을 하면 1,2년 동안은 접수에서보다는 대목에서 더 많은 싹이 난다. 그럴 때마다 대목에서 난 싹을 낱낱이 잘라버려야 결국 접수가 무성히 성장해서 대목에서는 싹이 나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접수 부분이 완전히 성장해서 우량종 나무가 되었더라도 풍해(風害)나 그외 일로 접수 부분이 많이 꺾여서 약해지면 또다시 대목에서 싹이 돋기 시작한다. 생체대상원리(生體代償原理)라 할까. 참으로 자연 현상은 오묘한 것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생명력의 발현(發現)이 있다. 즉 복숭아나무의 생명은 복숭아를 열게 하고 배나무의 생명은 배를 열게 한다. 이와 같이 아담의 후손인 인간 생명은 죄악의 열매를 맺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난 성도의 성품에는 신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이 병존(竝存)하여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한쪽에서는 거룩하게 살려하고 한쪽에서는 죄된 생활을 하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을 말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는 성령충만이 필요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끊임없이 인간 본성을 죽여 없애야 된다. 성도는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연스럽게 해방 받는 일면이 있다. 소위 노자(老子)의”아무것도 않고 절로 화한다(無爲以化).”라 할까.

 

그러나 한쪽에서는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해야 된다. 이는 인간 본래의 성품이 수시로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접수가 완전히 대목을 지배하기까지 장성하여야 좋은 결실을 맺는 법이다. 아! 언제나 하나님의 생명이 완전히 인간 생명을 삼키고 성령의 선한 열매만이 나에게 맺어질 것인가!

 

사람이 인간성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는 한에는 죄가 끝없이 도전하여 온다. 성령이 충만할 때는 거룩함을 좇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다가도 시험을 당하여 은혜가 식어지면 다시 인간성이 노출되어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럴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이 얼마나 감사한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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