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018-05-2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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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경제잠(朱子敬齊箴)중에 “입을 병과 같이 지키고(守口如甁) 뜻은 성과 같이 막으라(防意如城). 잠시라도 사이가 있으면(須叟有間)사욕이 만단으로 일어나리라(私欲萬端).” 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서 더러워지고 병 안에서 썩어짐을 막을 길이 없지 않는가.

 

내가 살던 시골 과수원에 샘이 하나 있었다. 물이 얼마나 좋은지 여름철에는 이를 꺾고 겨울철에는 차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수량이 풍부해서 논 50마지기를 이 물로 농사짓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의 샘이었다.

 

금년 여름에 시골집에 내려가자마자 쪽박을 들고 이 샘을 찾아갔다. 샘은 전에 없던 도관을 씌우고 주위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참 환경정리가 잘 되었구나.’ 마음으로 칭찬하고 쪽박으로 물을 듬뿍 떠서 벌컥벌컥 마시니 흙 냄새가 물씬 나며 미적지근하여 그 맑고 시원한 맛이라곤 전혀 없었다. 따라온 일꾼의 말이 도관을 해 씌우고부터는 물맛이 변했다 한다. 전에는 샘물이 퐁퐁 솟는 대로 그저 흘러내려갔는데 이제는 물이 마음대로 흘러내려갈 수 없고 되고 가두어진 채 고여 있으니 물맛이 변하고 만 것이다. 곧 망치로 도관에 구멍을 내어 물이 전과 같이 흘러 내리도록 하였더니 얼마 안 있어 샘이 다시 맑아지고 시원하고 맛 좋은 물이 되었다.

 

예수를 믿고 주라 하는 자마다 그 속에 성령의 생수가 솟아오른다. 성령이 속에서 충만하면 밖으로 흘러나기 마련이다(요한복음 7:38). 그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히게 된다(갈라디아서 5:22~24). 그런데 성령이 흘러나는 흔적이 없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이가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찬물샘을 연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해본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고, 생수가 되어 솟아나므로 기쁨이 오고, 평안이 오고 세상이 온통 내 세상이 된 듯하다가 시험이 다가와 여러 가지 인간적인 염려와 근심이 쌓이게 되면 주님은 제쳐놓고 내 수단 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이와 같은 아집(我執)이 성령의 찬물샘에 도관이 되어 성령의 흘러남을 막고 성령은 내 속에 침잠하고 말아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때때로 체험하는 일이다. 구역예배에 불시에 초청되어 아무 준비도 없이 말씀을 전하게 될때 ‘아이고 죽을 쑤게 되겠구나.’ 걱정이 되어 ‘주님! 너는 모릅니다. 잘 하든지 못 하든지 맡아 주십시오.’ 속으로 기도하고 성령님께 전부 맡기는 심정으로 설교를 하면 의외로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기뻐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미리 설교집도 참고하고 예화책도 읽어 멋지게 잘해 보리라 했지만 이것은 다 인위적인 시멘트 도관에 불과하여 겉으로는 미끈하면서도 아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설교 후 입맛이 씁쓸할 때가 허다했다.

 

옛날에 말을 잘 타는 것을 묘사하여 “안장 위에 사람 없고 안장 밑에 말이 없다(鞍上無人 鞍下無馬).”하였다. 사람과 말이 일체가 되어 사람이 달리는지 말이 달리는지 분간하지 못할 때 명기수(名騎手)가 되고 명마(名馬)가 된다.

 

성령이 기수(騎手)라면 우리는 말이다. 기수(성령)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달리는 말(성도)이 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생수가 우리 속에서 마음대로 흘러나게 하기 위하여느 아리(我利), 아욕(我慾)의 ‘나’라는 도관을 기도의 망치, 금식의 칼, 철야의 창으로 깨뜨려 부숴야만 하리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