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갓의 망령2018-06-10 14: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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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가 쓰고 다니는 갓을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갓은 방한(防寒)도 안 되고 뜨거운 햇빛도 못 가리고 풍우도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튼튼해서 머리를 보호해주는 것도 아니다. 아무 소용이 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을 우리 조상들은 외출할 때마다 쓰지 않으면 체신이 서지 아니하는 양 죽자 사자 쓰고 다녔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갓은 순전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장신구이지 모자는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어른들이 예의 바르고 어진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은 의관이다.”라고 말씀했었다. 갓을 쓴다는 것은 바로 예의가 바르고 체모가 있다는 상징이다. 그러나 아무 실속 없는 갓을 쓰고 체면치레에 급급했던 우리 조상님들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서글프기만 하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안 친다’ 든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에 손 안 쬔다’는데 이르러서는 오히려 처량하기만 하다. 여기에 비하면 차라리 공자(孔子)가 훨씬 실천적이다. “부를 구해서 얻을진대 비록 말채찍을 잡는 마부 노릇을 하더라도 나는 하고자 하거니와 만약 구해도 얻지 못할진대 내가 좋아하는 바를 좇으리라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겉치레로 갓만 쓰면 양반인 양 행세하던 유풍이 우리들을 얼마나 허례허식과 외식에 병들게 하였던가?

 

수년 전 시골로 가는 만원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60대의 영감이 갓을 쓰고 도중에서 승차하였는데 만원버스라 앉을 좌석이 없어 그냥 선 채로 가게 되었다. 갓이 버스 천정에 닿아 바로 서면 망가질세라 그는 애써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는데 그 궁상맞은 꼴이 보기에도 딱했다. 그런데 내리막 길에 접어들면서 몇 차례 펄석펄석 뛰는 바람에 갓 윗부분이 폭삭 주저앉아 납작하게 되었다. 노인은 그것도 모르고 쭈그리고 서 있는 모습이 영화에 나오는 암행어사 꼴이라 차중에 부지불식간 폭소가 터져 나왔다. 갓 쓴 체면이 그 꼴이 되었는데도 본인은 스스로 점잖은 체하고 서 있었다. 이제 갓은 시대와 함께 사라졌으되 그 망령은 아직도 살아 있다. 속이야 어떻든지 간에 겉모양만 번지르르 하면 그만이다 하는 풍조가 얼마나 풍미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해방 후 국회의원으로 활약하던 분이 실업계에 투신해서 스스로 공장장이 되어 진두 지휘하느라고 항상 작업복 차림으로 다녔는데 하루는 그 작업복 차림으로 모 기관에 들러 일을 보게 되었다. 담당 직원들이 외면을 하고 잘 대해주지 않아서 울화가 치밀던 차에 후배를 만나 이 일을 하소연하였더니 “선생님, 의복이 이러고서야 어찌 대우를 받겠습니까? 요즘 세상에는 잘 갖춰 입고 다녀야 제대로 대접을 받습니다.”했다. “사람을 보고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복을 보고 대접하다니…..” 하며 장탄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의관’의 후예들이 누려야 하는 유전이라 하겠다.

 

체면이란 그 사람의 인격적 내용이 풍기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은 내용보다 외모에 더 치중함으로 모든 분야에서 허영과 위선과 공허한 명분(名分)에 사로잡혀 바리새적 행세가 판을 친다. 그러나 가장 실질적이고 성실해야 할 실업계에도 많은 대형 사건들이 횡행(橫行) 천하(天下)를 하지 않는가? 내가 결혼 문제를 상담하면서 매양 느끼는 바가 있다.

 

결혼 당사자의 인간됨이 가장 중요한 것이건만 학벌이나 재산에 더 치중하고, 결혼을 하는 데도 혼수가 큰 문제가 된다. 가문의 체통과 자기 현시욕(自己 顯示慾)이 결혼생활 필수 요건보다 더 작용을 하여 혼수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으로 비약하고, 경쟁과 허영에 사로잡혀 피차 고민 아닌 고민에 시달리고 있는 양상을 볼 때 답답하기만 하다.

 

옛날 문중자가 말하기를 “혼인에 재물을 논하는 것은 야만인의 짓이다(婚娶而論財 夷虜之道也).”라고 하였다. 또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하였다.

 

결혼 생활의 참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직시하여 진리대로 행한다면 얼마나 자유함이 있겠는가? 학벌도 좋고 재물도 좋지만 진정 나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아껴 줄 사람끼리 만나 얼음 위에 댓닢 펴고 거적을 덮고 초야를 새운다 해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단칸 셋방살이로 시작했더라도 오순도순 사 모아가며 너 없이는 못 사는 소망의 나날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복스러운 부부이겠는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7) 하였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납하시고 간음한 여인도 불쌍히 보시었는데, 오직 의문(儀文)에 사로잡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28)하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33)고 맹렬히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왜 허다한 죄인을 다 두고 하필 외식하는 자만 이렇게 질책하셨던가? 죄인은 회개하면 선인이 된다. 옛말에도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으리요, 고치면 착하게 되느니라(人誰無過改則善).”고 하였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는 곧 위선하는 자라 자기 죄를 회개치 않고 정당화하여 은폐하고, 자기 스스로를 속일 뿐 아니라 남을 기만하여 죄를 더하게 하는 자이다. 고로 외식하는 자나 위선하는 자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로 보건대 외식과 위선이 가공할 만한 악덕임을 가히 알 만하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외식과 위선의 상징인 ‘갓의 망령’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내어쫒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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