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꿩 새끼 산으로 가고 오리 새끼 물로 간다2018-08-1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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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골에서 살 때 앞산에서 꿩알을 주워 와서 달걀과 함께 암탉에게 안겨 보았다. 21일 만에 병아리 7마리와 꿩 새끼 5마리가 깨어 나왔다. 하도 사랑스러워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꿩 새끼는 병아리와 달라 사람만 얼씬하면 어미 깃 속으로 숨어버린다. 아주 소심한 놈이라 만져볼 수도 없었다. 그 후 얼마 동안 자라면서도 사람과는 절대로 친해지지 않았다. 모이를 주면 병아리는 서슴없이 달려 와서 주워 먹는데도 꿩 새끼는 사람이 서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접근해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날개가 제법 자라날 무렵 꿩 새끼들은 앞산으로 모두 날아나고 말았다. 결국 “꿩 새끼 제 길로 간다.”는 속담 그대로다. ‘타고난 천성은 어이할 수 없구나.’하고 체념했다.

 

그 다음 또 오리알을 암탉에게 안겨 깨었더니 하루는 암탉이 오리 새끼를 데리고 집 앞 웅덩이 옆으로 지나가는데 오리 새끼가 일제히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암탉이 놀라 “꼬꼬꼬..”하며 새끼를 불러도 아랑곳없이 유유히 물 속에서 헤엄도 치고 자맥질도 하는 것이었다. 누가 오리 새끼에게 헤엄을 가르쳤단 말인가?

 

참으로 신기하다. 동물은 각기 제 천성에 따라 병아리는 인간에 붙어 살기 마련이고 꿩 새끼는 산으로 달아나기 마련이고 오리 새끼는 물을 떠나 물로 가기 마련이다. 누가 가르쳐서 되는 일이겠는가? 동물뿐 아니라 식물의 생명에도 각각 특성이 있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절로 열리고 배나무에는 배가 절로 열린다. 아무리 좋은 땅에서 잘 가꾸어도 고욤나무는 감 종류로되 도토리같이 잘고 맛이 떫은 고욤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부유종(富有種)은 척박한 땅에 자라도 굵고 달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누구라도 죄의 품성을 타고난다. 창세 이래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도다.”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다 죄 아래 팔렸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처음 믿고 가장 마음에 걸리던 일은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이 무조건 죄를 사해 주신다.”함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죄 없기를 원한다. 그러나 열 번 죄를 사함 받고 열한 번째 다시 죄를 짓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기독교는 악행을 조장하는 종교가 아닌가? 유교로 말하면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 잡은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修身齊家而後 治國平天下).”하였다. 기독교도 도(道)인 바에야 아무 수양도 노력도 없이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죄가 사해진다니 될 말인가? 하나님은 한 없이 선하시다. 그러나 “덮어놓고 선한 것은 악함만 같지 못하다(徒善不如惡).”고 했다. 누가 공자에게 묻기를 “원수를 은덕으로 갚음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그러면 덕행에는 무엇으로 갚겠느냐? 원수에게는 사심 없이 곧게 갚고 덕행에는 은덕으로 갚아라 (或曰以德報怨何如 子曰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응당한 벌로 죄를 다스리고 난 후에 사해 주실 것이지 덮어놓고 무모하게 죄만 사해 준다면 사람들이 “예수만 믿으면 이제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하지 않겠는가? 나는 해득하기 어려운 죄사(罪赦)의 진리를 고뇌하던 중 문득 성경을 펴보다 에스겔 36장25절에서 27절 이하를 읽게 되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과연 하나님은 무모 하시지 않구나!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무조건 사해 주심과 동시에 새 영 곧 성령을 우리 속에 넣어 주시고 우리 심령을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변화시켜 죄로 부패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겠다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된 품성 속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이 들어옴으로 꿩 새끼가 집을 버리고 산으로 가듯, 오리 새끼가 물을 떠나 물로 가듯 어떤 애쓰고 힘씀이 없을 지라도 절로 악을 떠나고 선을 행치 않겠는가? 그렇다. 예수만 믿고 나간다면 자연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 갈 수밖에 없다. 아!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기묘한 섭리는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 없다고 하겠다.

 

논어(論語)에 “백성들은 무조건 따르게 할 것이지 알게 해서는 안된다(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르쳐도 근본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품성을 타고 나온 백성인지라 본성을 따라 도리 없이 죄 짓기 마련이다. 도의 교육을 잘 시키고 법률을 빈틈없이 제정해 놓아도 생래적(生來的)으로 그 심성이 죄악으로 부패한 백성들이 어떻게 도의를 행할 수 있겠으며 법을 지킬 힘이 있겠는가?

 

한(漢나라 고조가 진(秦)나라의 그 복잡한 법률을 다 없애버리고 소위 약법삼장(約法三章)함으로 천하 인심을 거둔 고사가 이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정권이 바뀌면 법을 바꿨다. 그러나 아무리 법이 아름다워도 그 법을 행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이다. 온 국민이 민주주의를 사랑할 만한 정치적 역량과 국민 도의가 앙양되어야겠다. 단순히 서구 민주주의를 본뜬다고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어느 날 어미 게가 새끼 게에게 걸음걸이를 가르치며 본을 보이는데 자기가 옆으로 가고 있으면서 새끼 게에게는 바로 가라고 꾸짖더라는 우화가 있다. 마음에 원하는 바 선은 행치 못하고 도리어 악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변화 받지 못한 인생들의 비극이다.

 

이를 보건대 국민 도의를 앙양하기 위해서라도 기독교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되겠다. 악을 좇아 행하던 내가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을 좇아 행하게 되고, 오늘날까지 고욤나무 같은 내가 그리스도로 접붙임을 받아 부유감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예수 믿는 자로 하여금 악의 천성을 선으로 바꾸어 죄에서 구원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