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018.06.24] 실족하는 사람과 실족하게 하는 사람2018-06-2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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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7)

 



▶신앙생활은 장애물 경주와 흡사합니다. 방심하면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실족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첫째는,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념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 받고 거듭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지만 유혹과 환난과 핍박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신자들의 모임과 활동에 참여하면 세상적인 모임과 달라서 언제나 사랑과 은혜가 넘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신자의 신자답지 못한 언행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이 환난과 핍박 이상으로 신앙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는 곳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거나 놀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는, 실족하는 사람에게 닥칠 화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을 당하여서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하여 신앙을 버린다.” 혹은 “나는 누구 때문에 예수님 믿는 것을 포기한다.”라는 말은 “나는 무슨 이유로, 누구 때문에 지옥에 가기로 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옥이 실재한다는 것과 지옥이 얼마나 참혹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 지옥만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걸림이 되는 말과 행동을 접하게 될 때 실족하는 사람은 지독하게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과 그에게 닥칠 화가 얼마나 크고 두려운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언행을 절제 없이 하기 때문에 다른 신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예배에 잘 참석하고 주의 일에 힘쓰는 신자를 미혹하여 육신의 일에 힘쓰도록 하고 점차 믿음이 식어져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다가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이단 사이비 집단에 접촉하도록 신자를 유인하여 실족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넷째, 복음진리를 왜곡되고 혼잡하게 가르쳐서 신자를 실족하게 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은 천국으로 가고 있는 사람을 돌이켜 지옥으로 가게 하는 엄청난 죄악입니다. 이런 행위는 사탄의 종노릇하고 하수인 역할을 하는 일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 일이 있으면 철저히 회개하고 그 사람이 믿음을 회복하도록 힘껏 도와야 합니다.




넷째는, 실족하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이상으로는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됩니다. 둘째, 주관적 선입관념으로 인하여 성경에 계시하신 대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예언서를 읽으며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그들의 선입관념으로 인하여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오히려 배척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셋째,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신앙의 주요한 목적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실족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자신이 기대하고 구하는 대로 되기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믿으면 원치 않는 시련과 고난에 봉착하게 될 때 의심과 낙심으로 인해 실족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만나도 실족하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족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줄지언정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행위는 결코 하지 않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용목 목사님 신앙칼럼 ‘푸른 초장 맑은 시내’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