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느티나무 아래의 도(道) 이야기2018-10-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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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어찌된 셈인지 중과 선비와 목사가 우연히 길가 느티나무 밑에서 함께 쉬게 되었다. 먼저 선비가 “우리 심심한데 도담(道談)이나 하지 않겠소?”하고 말을 꺼내자 중이 “나무아미타불”하고 합장을 하더니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어떤 중이 향엄선사(香嚴禪師)에게 ‘도(道)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으니 ‘고목나무 속에서 용이 으르렁거리는 것이다(如何是道 枯木裡龍嘨).’라고 대답하자 또 ‘도중(道中)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해골 속의 눈알이다(如何是道中人 髑髏裏眼睛).’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것이 선문답(禪問答)이온 데 ①직지인심(直指人心) ②견성성불(見性成佛)하자는 것이지요. 대저 불교란 인간 모순을 초월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법이요, 진리외다.”하고 말을 마친다.

 

선비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 어려운 도를 어이하여 득도합니까?”하고 묻자 중이 득의 만면하여 대답하기를 “삼조대사(三祖大師) 승찬(僧燦)의 신심명(信心銘)에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좋다 나쁘다를 가리지 말고, 밉다 곱다도 하지 마라. 그리하면 차별상(差別相)에서 해탈하여 시원하고 명랑하여지리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선비가 또 묻기를 “인간으로서 어찌 목석이 아닌 바에야 좋다 나쁘다, 곱다 밉다를 하지 않고 살아갈 재간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중이 “각즉시불(覺卽是佛)이라 깨달아야지요.”한다.

 

선비가 탄식하여 “그러니 중이 머리 깎고 먹장삼 입고 세상 등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도 10년에 나무아미타불이 아니겠소. 웬만한 사람이 각(覺)하겠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우리 유교는 교화하기가 쉽지요.”

 

“하루는 공자님이 증자에게 ‘내 도는 한 이치로 만사를 관통하였다(吾道一以貫之).’하셨습니다. 증자의 문인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증자가 대답하되 ‘선생님의 도는 충성과 용서뿐이니라(夫子之道 忠恕而己矣).’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자께서는 ‘충은 내 마음을 다함이요, 서(恕)는 내 몸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유교의 최고 목표는 인(仁)인데 안연(顔淵)이 공자에게 인(仁)을 물으니 ‘내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니라(子曰 克己復禮爲仁).’고 말씀하셨습니다.”하면서 자못 만족한 표정으로 중을 바라본다.

 

중이 “공자의 가르침이야 선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행할 수 없는 것이 한이오이다. 자고로 공자왈 맹자왈 하며 선비인 체하면서도 위선자가 되기 쉬운 것은 박연암 선생이 선비의 위선을 풍자한 호질문(虎叱文)이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든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20)함과 같은데 다 신에게 절대 의지한 자가 터득한 신앙체험의 현지보고(現地報告)라 하겠습니다.

 

또 ‘좋다 나쁘다 밉다 곱다 하지 말라’는 것은 성경 말씀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4)함과 같군요.

 

그러나 불교는 무상(無常)을 깨달아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고로 수양만으로는 집착을 떠나기가 심히 어렵과, 근본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 현실 세계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한데 비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세기 1:28) 하신 말씀에 입각한 현실 긍정의 태도와는 퍽 대조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교로 말하면 강령이 충서(忠恕)라 하였는데 성경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 40)함과 같습니다.

 

또 인(仁)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하였는데 성경에도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2~14)고 한 말씀이 있으니 다 동일한 가르침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유교는 인간 사회의 규범을 말하고 개인의 도덕을 강조한 것뿐이니 구원의 도와는 거리가 멀고 절망에 처한 인생에게 소망을 줄 수 없다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교는 도덕을 논하고 불교는 해탈을 논했지만 자력으로 득도하기가 심히 어려운데 기독교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대신 우리를 살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함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시켜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값 없이 공로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3)함과 같습니다. 고로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갈라디아서 2:16)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행적(代行的)삶을 통한 승리의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공자는 착한 일을 행하라 하고 석가는 깨달으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행하고 깨달을 힘이 없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착한 사람이 되게 하여 저절로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필자가 전도 다닐 때 초신자의 공통된 질문이 불교나 유교를 잘만 믿으면 그만이지 하필 예수만 믿어라 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이 글은 이에 대답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러나 비재천학(菲才淺學)으로 어찌 필자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마는 초신자를 위한 충정이니 잘못된 것이 있으면 꼭 꾸짖고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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