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2017-10-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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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별난 짓이나 무슨 굉장한 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가 원활히 이루어질 때 깃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행복은 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우리들 모임에 나타나기만 하면 우리들로 하여금 웃음이 터지게 하고 즐거운 분위기에 싸여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그래서 어쩌다가 이 친구가 불참하는 날에는 모임이 쓸쓸해지고 모인 사람 모두가 한결같이 섭섭해 한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이렇게 웃음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한 사람씩만 있어도 그 가정이나 그 직장은 행복해질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만 나도 즐겁고 남에게도 행복감을 안겨 줄 수 있을까?

첫째로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명랑하고 친절하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다. 공연히 찌푸린 얼굴에 의아한 눈초리로 사람을 대하여 상대의 가슴을 섬짓하게 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항상 미소 띤 명랑한 얼굴로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며 이해심 있게 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남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피차 기분 좋게 사귈수 있게 한다. 속담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피차 침 뱉고 지내는 사이라도 웃는 얼굴에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은 웃다가도 사람을 대할 때는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는 경향이 많다. 오랜 유교 교육에 젖어진 탓이랄까. 기뻐도, 성이나도, 슬퍼도, 즐거워도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이 점잖은 사람의 취할 태도라고 우리들은 배워왔다. 덤덤하게 너무나 돌같이 굳은 얼굴이라 위엄은 있을지 몰라도 친근감은 없다.

 

우리 교회 집사님이요, 구역장인 한 자매님이 있다. 항상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언제 보아도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친절하게 구역 성도를 인도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보살펴 준다. 하루는 그 자매님과 함께 한 성도를 심방했는데 그 성도는 전신마비로 오랫동안 와병 중에 있는 분이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도 집사님은 환자의 이마에 땀을 닦아 주고 수족을 주물러 주며 안타까이 기도를 드렸다. 그 모습은 같이 간 내가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성스러웠다.

 

범사가 이와 같으니까 구역 식구가 마치 한 집안 식구 같다. 구역예배에 가보면 구역 식구들도 구역장을 닮아서 활짝 웃는 얼굴에 천사처럼 찬송을 부르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닌가 싶다. 우리 다 명랑한 얼굴로 적의(敵意)없이 활짝 웃으며 사람을 대하고 서로 이해하며 살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로마서 15:2)

 

둘째,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남의 잘한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덮어놓고 남에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듣는 이가 기쁠 리가 없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요, 아내 자랑은 온병신이라 했다. 복음 전도를 위한 간증일지라도 내 자랑이 심하면 남을 불쾌하게 한다. 오히려 남의 일같이 이야기하면 덕스럽고 듣기에 좋다. 어쨌든 자랑함으로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미음을 사고 경멸을 당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잠언 27:2) 사람은 자기 자랑하기는 쉬워도 남을 칭찬하기는 어렵다. 무슨 일이건 선악이 상반(相反)이다. 좋은 면만 보고 조금만 잘한 일이라도 찾아내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동시에 이 칭찬이야말로 선을 조장하고 악을 억제케 하는 비결이다.

 

신학교를 갓나온 전도사가 처음으로 강대상에서 서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너무 긴장되고 흥분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요령 없이 설교를 하다 보니 성도들의 반응이 별로 없어 보였다. 엉망으로 죽을 쑤었다고 생각되어서 낙심에 빠졌다. ‘아무래도 나는 설교에는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닌가하고 느껴지니 목회를 해나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그때 전도사에게 쪽지가 전해졌다. 펴보니 그만하면 당신은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을 거요.”라고 씌어 있고 당회장 목사님의 사인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그 전도사는 큰 용기를 얻고 그 후 좋은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브리서 10:24)

 

셋째,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다. 비열한 소행이다. 조그마한 은혜를 받고서도 고맙다고 감사를 하면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다 함께 행복해진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하기를 쑥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차 안에서 자리를 양보해주는 학생에게 감사하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로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말없이 앉아버리는 노인네가 있다.

 

오래 전 내가 부산에서 살 때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크리스마스에 원장 선교사가 입원한 산모들을 심방하고 선교사를 바로 쳐다보기가 부끄러웠던지 말없이 돌아누워버렸다는 것이다. 동행한 여의사가 하도 민망해서 여보세요. 고맙다는 말들이나 좀 하세요.”하니까 그들은 누가 고마워 안 하는가봐.”하면서도 끝내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마침 그 방에 입원해 있던 일본 여성이 자기 차례가 되어 선물을 받고는 고맙습니다. 원장 선생님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해 그 방 분위기가 감사함으로 흐믓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넷째,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사람이다.

누가 실수를 하면 꼬치꼬치 따지고 정죄를 해야만 속시원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옛말에도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고 했다. 남의 실수를 보고 사람은 다 연약하니 누구나 그럴 수도 있다고 용납하고 덮어 주며 시시비비를 너무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주위가 항상 훈훈한 봄바람이 분다.

 

내가 어릴 때의 일이다. 우리 어머니는 학식은 없었으나 내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교훈 하나를 남겨 주셨다. 여러 친척 가운데 다른 사람의 비행을 자주 고자질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들아, 별다른 사람이 있나하는 한 말씀 뿐 이었다. 많은 친척들이 어머니를 따르던 이유를 이제 알 듯하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

 

다섯째,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제 말만 하고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대개 이런 사람은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남을 피곤케 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없다(言多語失).” 고 한다. 고요히 미소짓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말하는 사람이 행복감을 느낀다. 속에 있는 말을 안 하고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인간이기에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들어줄 수 있는 아량을 가진 사람은 환영받는 사람이요, 남을 행복케 하는 사람이다.

 

내가 돌보는 사무실에 여직원이 있다. 아직 나이가 22세 밖에 안 되었지만 놀랍게도 영리하고 차분한 아가씨다. 봉직한 지 1년 반 동안 수천 통의 전화와 수천 명의 내방객을 맞았는데 언제나 고요하고 잔잔한 음성으로 응대한다. 때로는 귀찮고 성가신 요구를 한정 없이 늘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얼굴을 붉히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어 끝까지 미소짓는 얼굴로 잘 들어준다. 오히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성을 내어도 그 아가씨는 부드럽게 손님을 다독거려 보낸다. 이래서 이 아가씨는 우리 사무실의 꽃이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야고보서 1:19)

 

여섯째, 행복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남이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며 성원해 주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빠지기 쉬운 허물은 선생이 되어서 남의 일을 간섭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를 괴롭히고 또 미움을 사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남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성된 말이 귀에 거슬린다(忠言逆耳).”고 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부부간이라도 남편이 아내가 하는 일에 늘 참견을 하여 이래라 저래라 기뻐할 아내가 없다. 그런고로 책선(責善)이 어렵다. 끝까지 남이 하는 일을 가만히 참고 보아주며 성원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요,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을축년 대홍수때 내가 살던 고향 남천(南天)이 범람하여 부산서 경주로 가는 간선도로가 끊어졌었다. 사람들이 방죽에 나와 굽이치는 물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건장한 청년이 물에 뛰어들어 건너갔다. 이 남천은 물살이 세고 급류라 홍수 때는 감히 누구도 건널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청년을 만류하였지만 청년은 끝내 듣지 않고 내 중간까지 들어섰다. 물이 가슴까지 풀풀 기어오르니 위험하기가 짝이 없었다. 구경꾼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그 청년에게 도로 나오라고 야단이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망설이다가 돌아서는 찰나 기우뚱하더니 쓰러져 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두가 애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얼마 후에 40대의 장년이 또 물을 건너려고 했다.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오늘 저녁에 아버님의 제사가 있어서 안 갈 수 없습니다.”하고 말하는데 비장한 각오가 눈썹에 서렸다. 아무도 말릴 수가 없어서 내버려두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장년도 내 중간에 이르러 물살이 가슴을 치니 주춤하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다들 박수를 쳐줍시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참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만약 군중이 또 돌아서라고 고함쳤다면 그 거센 물결에 무사히 돌아설 수 있었겠는가? 일제히 박수를 치고 응원하는 데 힘을 얻어 그 장년은 무사히 건너갔다.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야고보서 3:1)

 

일골째, 행복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남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항우(項羽)는 제 고집에 망했다 한다. 고집하면 자기 중심이 되고 자기 중심이 되면 배타적이 되어 화목을 깨고 사람과의 협동단결을 방해한다. 분명히 자기가 잘못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면상 빡빡 우기는 고집은 차라리 밉살스러울 뿐이다.

 

과거 나와 같이 수년 동안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한 자매님이 있었다. 얼마나 겸손한지 자기는 뒤에 숨고 남을 앞세우며 자기를 나타내어 고집하는 일이 없었다. 때로는 무능하다고 오해를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당당히 대학을 나왔고 식견이 풍부하여 일을 잘 했다. 한 번은 후배가 자기 윗자리에 앉은 일 있었다. 주위에서 위로의 말을 하면 그분이 나보다는 적임이에요.” 하면서 조금도 섭섭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항상 그 직장에서 화목의 중심이 되어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었다.

 

공자는 사사로운 뜻이 없고 기필함이 없고 고집함이 없고 나를 내세우는 것이 없었다.”했다. 우리도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남을 앞세우는 사람이 될 때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리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이상 여러 가지 말들은 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심히 어렵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기를 힘쓰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라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립보서 4:4~5)